성난 농심, 정치권.정부가 어떻게 풀지가 큰 숙제

농민단체,  “정권 퇴진운동 불사”
정부,  “쌀산업 경쟁력 키워나갈 것”

 

몇 달째 처리가 지연되면서 진통을 겪어 온 세계무역기구(WTO) ‘쌀 관세화 유예협상’에 대한 비준동의안이 지난 23일 마침내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이르면 내년 3월 수입쌀이 국내 소비시장에 나올 전망이다.

   
▲ 국회는 23일 오후 본회의를 열어 찬성 139표, 반대 61표, 기권 23표로 쌀 협상안 비준동의안을 가결했다.

이날 국회의 쌀협상 비준안 처리는 ‘한국의 국제신인도 하락과 쌀 관세화 조치를 막기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분노한 농심(農心)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국회 앞 집회를 비롯해 각종 관공서 점거, 도로 점거가 이어지던 중 급기한 한 농민이 분을 못 이기고 분신을 시도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찬성 139·반대 61·기권 23표

■  쌀협상 비준안 국회 통과과정   국회는 이날 본회의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의 반발 속에 전자 표결을 강행, 표결참석 의원 223명 가운데 찬성 139, 반대 61, 기권 23표로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표결에 앞서 노회찬, 단병호, 이영순 의원 등 민노당 소속 의원들이 본회의장 의장석을 한때 점거하며 강력 반발했고, 한화갑 대표 등 민주당 의원들도 의장석 주변에서 ‘처리연기’ 시위를 벌였다. 또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과 민노당 의원들 간에 밀고 밀치는 몸싸움도 벌어졌다.

열린우리당은 국익을 위해 더 이상 쌀협상 비준동의안 처리를 미룰 수 없다며 당론으로 찬성 표결에 나섰고, 한나라당은 의원들의 자유투표에 맡겼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 겸 원내대표는 동의안 통과 뒤 “협상결과가 만족할 상황은

   
▲ 지난 10월 27일 오전 쌀협상 비준안 처리를 위해 국회 질서유지권이 발동된 가운데 국회 통외통위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쌀 관세화 유예협상에 대한 비준동의안’을 의결했다.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다시 할 상황도 아니다”면서 “후속대책을 지금부터 잘 세워 보완대책 마련에 차질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이계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농민들의 타는 가슴을 생각하면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으나 정부가 제출한 동의요청에 적시한 시기적 불가피성을 감안하면 농민들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 이낙연 원내대표는 “쌀비준안 처리 연기의 뜻을 이루지 못해 참으로 착잡하고 안타깝다. 350만 농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면서 “붕괴 위기에 처한 농업과 농민, 농촌을 살리기 위한 정책 마련에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민노당 권영길 임시대표도 기자회견을 갖고 “대한민국 국회가 350만 농민에 대한 사망선고를 압도적 지지로 집행했다”면서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은 가증스런 ‘살농(殺農)대연정’에 한 몸이 됐다”고 주장했다.

쌀협상 비준안은 지난 6월 7일 국회에 제출됐으나 민노당 등의 반발로 상정이 미뤄져 오다가 지난달 초 통일외교통상위에 상정된 뒤 질서유지권이 발동된 가운데 지난달 27일 상임위를 통과했고, 이날 국회 제출 5개월여 만에 본회의를 통과했다.

농민들 잇따른 분신·사망

■  농민·농민단체 등 반발 심해    이날 오후 국회에서 쌀협상 비준안이 통과되자 농민들의 분노와 좌절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농민의 분신과 죽음 등 안타까운 소식들이 이어지고 있다.
 
23일 오후 11시20분께 경남 창원시 경남도청 앞에서 쌀 비준안 통과 반대 집회를 열

   
   
▲ 23일 쌀협상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분노한 농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던 도중 농민 김성규(48·의령) 씨가 불이 붙은 기름통에 뛰어들어 분신을 시도했다.
 
이에 주위에 있던 농민들이 김씨 몸에 붙은 불을 긴급히 끄고 곧바로 구급차로 창원병원으로 후송해 응급처치를 실시했으나 전신 3도 화상을 입는 등 중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새벽 2시께 화상 전문 병원인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
 
이날 부산·경남지역 농민들은 국회의 쌀 비준안 강행처리에 맞서 농민 300여 명이 차량과 트랙터 등을 이용해 고속도로 진입 투쟁을 벌였으며, 고속도로 점거 농성 등을 벌이다 오후 3시경 쌀 비준안 통과 소식을 듣고 경남 창원 도청 앞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시위 농민들을 대거 연행해 마산, 밀양 경찰서 등에 분산 수용했고, 이에 반발한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 회원 및 농민들은 오후 8시 경남도청 도지사실을 점거하고 연행자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은 이에 따라 연행농민을 석방키로 약속했고, 오후 9시 농민들은 도지사실 점거를 풀었다. 그러나 경찰은 ‘조사 후 석방’ 입장에 따라 연행 농민들에 대한 조서를 받느라 석방 시간이 지연됐고, 농민들은 이에 반발해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밤 11시부터 경남도청 앞에 적재된 나락에 불을 붙이며 연좌농성을 벌이던 중 김 씨가 분신을 시도했다.
 
전농 부경연맹은 24일 오전 ‘쌀협상 국회비준 국회 강행처리와 김성규 동지 분신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전농 부경연맹은 성명서에서 “어제(23일) 1만5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혼과 삶을 이끌어온 쌀농업이 노무현 정권에 의해 타살됐다”며 “노무현 정권은 350만 농민과 식량주권을 지켜내자고 주장해온 모든 국민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고 밝혔다.
 
전농 부경연맹은  이어 “우리는 머리가 터지고, 갈비뼈가 부스러지고, 방패에 짓이겨도 쓰러지지 않고 쌀을 지키기 위해 군청 앞으로, 도청 앞으로, 국회 앞으로 모여 외쳤다”며 “또한 자식같은 나락을 천덕꾸러기인 양 아스팔트에 쌓고 화염 속에 불타게 했다”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또 “350만 농민은 노무현 정권과 보수 정치권이 벌인 야비하고 잔인한 살농(殺農) 현장을 봤다. 우리는 반드시 농민에게 비수를 꽂은 잔인한 노무현 정권에게 백배천배로 되갚을 것이다”이라고 했다.

한편,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농민대회에 참가했던 보령농민회 전용철 주교면 지회장이 24일 아침 7시경 숨졌다.

2014년까지 40만8,700톤 수입

■  얼마나 수입되나?   비준안 통과에 따라 우리나라는 쌀 시장 전면 개방을 유예하는 대신 의무수입물량은 연차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협상 결과에 따라 우리나라는 지난해 국내 쌀 소비량의 4%(20만5,000톤)였던 의무수입물량을 2014년 7.96%(40만8,700톤)까지 매년 늘려가야 한다.

의무수입물량 중 기존 물량은 2001∼2003년 수입실적을 반영해 미국ㆍ중국ㆍ태국ㆍ호주 4개국에 국가별 쿼터를 배정하고, 추가로 늘어나는 신규 물량은 국제 공개 입찰을 통해 수입하게 된다.  

또 이행 5년 차가 되는 2009년에는 이행 상황에 대한 다자간 중간 점검을 받게 된다. 단 우리나라는 관세화 유예기간 중이라도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관세화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고 있다.

수입쌀 국내시판 내년 3∼5월

■  시중판매 어떻게 되나?   쌀과자 등 가공용으로만 공급하던 수입 쌀 물량 중 10%를 밥쌀용으로 시중에 판매해야 한다. 밥쌀용 판매 비율은 매년 균등하게 증량, 2010년까지 30%로 늘리고 이 비율은 2014년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국회 비준이 늦어지면서 올해 22만5,000톤을 수입해 이 중 10%인 2만2,500톤을 시판해야 하는 약속 이행은 이미 불가능한 상태다. 입찰 공고부터 낙찰ㆍ운송ㆍ통관 등 과정을 감안하면 최소한 3∼4개월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농림부는 관련 법령 개정과 국무회의 의결 등 후속 조치를 최대한 빨리 추진해 다음달 초ㆍ중순께 입찰 공고를 낼 예정이지만 수입쌀의 국내 시판은 내년 3∼5월이 돼야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 공공비축물량 400만석 올해 매입

■  시장에 미치는 영향과 남은 과제  정부는 시판되는 수입 쌀 물량이 국내 소비량의 0.4%에 불과한 소량이므로 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농민들의 심리적 충격으로 인한 쌀값 하락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수입쌀 시판은 국내 쌀 가격의 15∼20% 하락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쌀 농업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 쌀 협상 비준안이 통과됨에 따라 국내 쌀산업의 경쟁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전남도가 수입쌀 시판에 따른 경쟁력 확보하기 위해 탄생시킨 최고급 쌀인 ‘탑 라이스’.

한편, 협상 결과에 따른 올해 의무수입물량 시판이 이뤄지지 않자 미국 등 협상 대상국들이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비준안이 통과되면서 약속 불이행에 대한 양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해동 농림부 농업협상과장은 “그동안 협상 상대국들과의 잦은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사정에 대해 거듭 이해를 구해 왔으므로, 앞으로 성실히 의무사항을 이행한다면 큰 문제는 발생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 과장은 이어 “늦었지만 쌀 협상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향후 10년의 유예 기간 동안 모든 노력을 집중해 개방 체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쌀 산업 경쟁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특히 내년과 2007년 중으로 일시상환토록 돼 있는 농가부채 5조9,000억 원을 3∼5년동안 균등분할 상환토록 하고 농업관련 정책자금의 금리를 1∼2.5%포인트 인하키로 했다. 또 농가부채의 농지를 매입해 재임대하는 경영회생지원사업을 대폭 확대하고, 쌀시장 안정을 위해 올해 400만석 매입키로 한 공공비축물량과는 별도로 100만석을 추가 매입키로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 대책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 한마디로 정부를 못 믿겠다는 것이다.

국회가 이날 비준안을 통과함에 따라 앞으로 농민들의 반발은 더 거세질 것으로 우려된다. 이와 관련 전농은 이미 정권퇴진운동까지 벌이겠다고 밝힌 상태다. 성난 농심을 정치권과 정부가 어떻게 풀지가 큰 숙제로 남아 있다.  <배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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