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 대부분에서 사용하고 있는 염소, 편리하면서도 잘못 다루면 큰일<이기사는 워터저널 11월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35년간 수도공무원이라는 외길만을 걸어온 김홍선 대전시 상수도사업본부장(58). 그는 전국 특·광역시 상수도사업본부장(역대 포함) 중 유일하게 상하수도기술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수도전문가이면서 CEO이다. 김홍선 본부장은 35년간 상수도라고 하는 ‘한 우물 파기에 일생을 바친’경험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인 〈또하나의 시작을위하여>를 최근 발간했다.
본지는 김 본부장의 경험담이 상수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도록 하기위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designtimesp=17101>


수돗물이란 음용에 부적합한 물을 음용에 적합하도록 깨끗하게 정수 처리한 물로서, 정수 처리의 주요 공정은 물 속에 함유된 탁도를 0.3NTU(NTU: Nephelometric Turbidity Unit) 이하로 제거하는 과정과 유해성 중금속을 제거 또는 제어하는 과정, 그리고 유해성 세균을 살균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탁도를 제거하는 공정인 여과처리는 정수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로 관리되고 있고, 여과 방법의 선택은 처리 수량의 규모 및 수질의 오염 정도에 따라서 완속여과 또는 급속여과 방법이 선택되며, 살균은 염소(Cl2) 또는 오존(O3) 등에 의한 방법이 있으나 가장 저렴하고 확실한 살균제는 염소(鹽素)로서 현재에도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염소는 살균 후에 소독 부산물의 잔류성이 있어 살균 여부가 쉽게 판단이 됨으로 다른 살균제에 비해 장점으로 구분되고 있고, 급수 전 관말에서 반드시 평상시에는 0.2mg/ℓ 이상 그리고 수인성 전염병의 발병이 우려되는 때에는 0.4mg/ℓ 이상의 잔류염소가 검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본인은 경제개발 제1차 5개년 계획이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던 1966년 9월 24일에 D시 수도과 급수계에 처음으로 9급 토목직 공무원으로 임용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건부 지방토목기원보, 현재는 지방토목서기보로 명칭이 변경되었지만….

충남도에서 시행한 제2회 토목직 공무원 공개 채용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통지를 받고 2개월만에 L시장에게 선서를 하고 사령장을 받게 된다. 선서의 내용은 공직자로서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 등등. 아침에 출근하면 우선 사무실 바닥의 물청소와 책상의 물걸레질 청소를 하고 상사들의 담배, 커피 심부름, 구두 닦는 일, 이런저런 일이 끝나면 소방차 또는 청소차에 물통을 싣고 동구 삼성동, 성남동, 대동 등 고지대에 비상 급수 운반이 시작된다. 당시는 공급능력이 절대 부족하여 저지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간제 급수를 해야하는 실정이었다.

소방차에 물통 싣고 급수 운반

가정주부들은 하루 생활의 일부가 먹는 물을 확보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수돗물이 좋으니, 나쁘니 하지만 만약에 지금도 수돗물이 부족하여 시간제로 급수한다면 가정주부님들이 대낮에 찜질방에서 몇 시간씩 땀을 빼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나 행복한 일일 것이다. 급수차량 부족으로 하루에 한, 두차례 운반하지만 주민들은 그렇게 고마워 할 수가 없었다. 보람도 느꼈다.

이렇게 상수도 업무와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급수 난은 언제 해소될 것인지 기약이 없다. 상수도 업무는 기술직 공무원들이 선호하는 부서가 아님을 나중에 알게 된다. 이유는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고, 물이 부족해서 매일 민원에 시달리기 일쑤이며, 또 하나는 업무가 다양해서 단기간에 배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수도 업무는 토목 및 건축분야가 30%, 기계·전기분야가 30%, 수질·화공분야 30%, 경영 분야가 10% 정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전 분야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엔지니어가 된다는 것은 많은 시간도 소요되고 또한 학문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업무에 내가 도전하고 싶었다. 일단은 기계 전기 분야부터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3년 과정을 1년 단기 코스로 배울 수 있는 공업기술연수원이 도청소재지 공업고등학교에 설치되는 기회가 생기고 야간과정이 개설되어 대전공업고등학교 부설 전기과에 입학하게 된다. 전기과에서는 전기, 기계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동구 삼성동에 위치하고 있어 오후 6시에 퇴근하고 6시 30분까지 등교하여야 하고 학교까지는 버스로 30분 이상이 소요되었고, 시내버스는 20분 간격으로 배차되고 있어 저녁식사를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저녁은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도착하여 밤 10∼11시 정도가 되어야 해결할 수 있었고 생활 역시도 막내 동생과 자취를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너무 늦은 시간이면 건너뛰는 일이 보통이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있다고 해도 점심도 도시락을 갖고 다니는 형편으로 밖에서의 외식은 호주머니 사정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생활은 1년 동안 계속되어 3월에 입학하여 12월에 수료를 하게 되었다. 이 기간이 내 일생에서 가장 어려웠고 가장 힘들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1969년 12월 10일로 기억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경부고속도로가 1단계로 서울에서 수원까지 개통되고 2단계로 수원에서 대전까지 개통될 즈음으로 누구든지 고속버스를 한 번 타보는 것이 꿈이었던 그 시절, 서울을 가려면 기차로 4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시청에는 단체장과 부단체장 정도의 관용차가 있고 몇대의 청소 트럭이 뒷마당에 있을 정도의 시기, 수돗물 공급 규모는 세천 수원지에서 3천500㎥, 유등천의 S정수장에서 2만㎥로 합계 2만3천500㎥을 공급 생산하였다. 급수 구역도 현재의 중구와 동구 일부 정도였다. S정수장에서는 유천·문화·산성·대흥·대사·선화·용두동 등에 공급하였고, 특히 대흥동 배수지 부근인 도지사 관사촌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세천수원지 계통에서는 식장산 밑의 저수지 물을 P정수장에서 정수하여 판암·신흥동을 비롯하여 인동, 원동, 신안동, 대동, 중동, 정동 등과 주로 대전역의 기차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한 정수장에 1명이 24시간 근무

현재의 판암동 배수지는 1931년 12월 11일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준공되었고 전형적인 완속여과 방법으로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건설한 유일한 정수장으로 D시에서는 1981년 5월 15일까지 사용되었다. 70년 전인 정수장 건설 당시에 일본인들이 심어놓은 벚꽃나무 300여 그루는 지금도 개화시기에 많은 상춘객으로 초만원이 되고 있고 주변 주민들의 유일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도시 내의 토목시설은 기능도 중요하지만 외형적인 아름다움도 중요하다.

그 후에 급수 수요가 증가하면서 여과 설비 기능을 폐쇄시키고 6천㎥ 규모의 배수지로 개량하여 사용하다가 판암동 주변이 급속도로 개발되면서 배수지의 수두가 상대적으로 낮아지게 되자 배수지 입구에 가압장을 건설하여 대청댐 주변의 용수공급시설로 변경되었고, 2002년부터는 도시 공원으로 개방하라는 시민들의 여망에 따라 수도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테마 공원과 고가 배수탑이 건설되고 배수지 상부에는 전망대를 설치하여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상수원수를 공급하는 세천저수지는 36만㎥ 규모로서 1980년도쯤으로 기억되는데 L시장이 대전천을 정화하겠다고 P배수지에서 문창교 하상까지 PVC(D= 200mm, L= 2천500m) 배수관을 매설하여 분수대를 설치하여 운영하다가 시장이 전보되면서 흐지부지 운영되다가 폐쇄되었다. 하천의 정화보다는 예산만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수돗물의 살균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염소 또는 오존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염소는 액체 염소와 크로로칼키인 분말염소로 구분된다. 소규모 정수장 또는 염소가 갑자기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일정량을 항상 비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크로로칼키는 액체염소에 비해서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가능한한 사용을 억제하고 있다.
P정수장에는 조그마한 사택을 사무실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고 근무자는 조무원급 기능직으로서 1명이 가족과 함께 사택에서 24시간 혼자서 근무를 하고 있다. 근무자는 염소 투입량 감시와 정수장의 경비 및 구내청소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완속 여과지는 여과속도가 1일 4∼5m로서 역세척 기능이 없기 때문에 매월 1회씩 여과지의 오염된 모래층을 삽으로 제거하여 모래층을 양호하게 유지하게 되는 시설이다. 생산 규모가 작으므로 염소 투입량도 60kg 1통이면 1개월 정도 사용하게 된다. 당시에는 염소생산 공장이 구포공장 단 한 개소로서 공급량이 수요량에 못 미치기 때문에 가성소다 협동조합에 물품 대금을 선납하고도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염소를 얻을 수 있었다.

배수지에서는 염소의 잔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느 때 염소가 떨어지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으므로 염소 투입기가 멈추어야 비로소 배수지에 배치된 직원은 수도과 급수계에 일일업무 상황을 보고하게 된다. 나는 말석 직원으로서 세천수원지와 판암동 배수지에 관련된 업무처리가 주 업무였는데 세천수원지는 봄, 가을에는 상춘객이 많이 놀러오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시내 근교에 마땅한 휴식공간이 없고 또한 교통수단이 시내버스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먼 거리까지의 나들이는 생각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상춘객 또한 저수지의 오염보다는 익사사고를 방지하기 위하거나 혹은 생활곤란, 청춘사업 실패 등으로 자살 익사사고가 1년이면 5∼6회 정도 발생하기 때문에 주말이나 휴일에는 수원지 감시업무가 주어진다.

1967년 이른봄으로 기억된다.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세천수원지에서 20대 처녀가 생활고를 비관한 유서를 남겨놓고 저수지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는 경찰서 전화 연락이 온 것이다. 익사시간은 해가 진 후로 추정되었고, 내가 근무한 동안에는 발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으나 수원지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은 빨리 퍼졌고 시체는 다행스럽게 오전 중에 인양될 수 있었다. 소문은 3∼4일간 지속되었고 완벽한 정수처리와 소독을 하였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해명을 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처음 타보는 서울행 고속버스

정수장관리는 여과지관리와 소독관리, 그리고 주변환경 관리가 주요 감독업무로 되어 있다. 그 날도 출근과 동시에 염소가 떨어졌다는 보고가 사업장에서 왔다. K급수계장에게 보고를 드렸다. 계장님께서는 버럭 화부터 내셨다. 왜 또 크로로칼키 업자에게 돈 벌어주려고 하느냐고…. 살균은 안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선 크로로칼키 상회에서 외상으로 갖다 투입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리고 내일 당장 서울에 가서 염소가 언제쯤 도착하게 되는지 알아보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나는 이제야 고속버스를 타게 되었다고 속으로 좋아했다. 하위 공직자 신분으로 처음 있는 출장이라서 마음이 설레기도 하였다. 12월 24일 9시, 대전에서 출발하는 서울행 하진 고속버스를 탔다. 고속버스는 안전벨트를 착용하라고 하는 안내양의 안내 방송에 이어 곧바로 출발한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고속버스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고속버스 내에는 아주 예쁜 안내양이 동승하여 과자도 주고, 따뜻한 음료수까지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요즘의 국내선 비행기 정도의 차내 서비스를 하였다. 서울까지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11시경에 서울역 건너편에 있는 한진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서울 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지하철은 탈 수가 없기 때문에 택시를 탔다. 가성소다협동조합은 중구 소공동 소재 상공회의소 빌딩에 있었다. 조합 사무실에는 여직원 1명과 전무이사급 되는 사람이 있었다. 출장 온 사유를 말하니까 전무라고 하는 사람은 의자에 앉으라는 인사도 없이 퉁명스럽게 용산역에서 이미 염소가 출발했으니 그냥 내려가라고 하기에 사무실에 전화나 한 통화 해달라고 부탁하고 조합 사무실을 나왔다.

모처럼 서울 시내를 걸어 보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겨울 날씨는 영하 12도 정도로 매우 추웠다. 빠이로 외투를 입었어도 대단히 추웠다. 당시는 빠이로 외투를 입는 것이 유행이었고 옷은 대개 5개월 월부로 맞춰 입었다. 배고픔을 느껴서 시계를 보니 12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너무 이른 시각에 출발하느라 아침을 굶은 것이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으려고 지하도 식당에 들어갔다. 작은 식당이었지만 손님은 대단히 많았다. 국밥 한 그릇 시켜서 점심을 먹고 나니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한 Y생각이 났다.

Y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하여 지하상가로 내려갔다. 연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역시 서울은 복잡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Y가 좋아할 것 같은 선물 몇 가지를 사고나니 시간이 꽤 지난 것을 느꼈다. 사무실에 전화 연락을 하기 위하여 공중 전화를 찾았으나 주변엔 없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학생들도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실정이지만 당시만 해도 공중전화도 쉽게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한참을 가서야 찾았지만 시외 전화는 공중전화로는 통화를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개인 상점에서는 빌려 쓸 수가 없으므로 우체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우체국에는 연말 연하장, 카드, 등기우편, 선물 등을 발송하려는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사무실에 시외전화로 염소가 대전역에 도착되는 시간 등을 알려주고 우체국을 나왔다. 서울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7시경에 대전에 도착했다. 마침 Y는 대전역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다음 날은 12월 25일로 휴일이므로 저녁 늦게까지 돌아다녔다.

운반중 염소통 터져 주민 피해

26일 종전대로 8시경에 시청에 출근을 했다. 동구 대동에서 현재의 대흥동 구 시청까지는 6km 정도로 도보 출근 거리로는 조금 멀었다. 3층 수도과에는 문이 잠겨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수도관이 동파되었다는 전화가 많이 올 텐데 조용했다. 1층으로 내려와서 숙직실 당직자에게 사무실 열쇠를 달라고 하자, 당신은 수도과에 큰일이 난 것도 모르냐고 한다. 무슨 일이냐고 반문하자 도립병원으로 가보면 안다고 했다. 어제부터 수도과 전 직원은 수도과장 특별명령으로 도립병원에서 사고 피해 수습과 유족들의 일손을 돕고 있었다.

30분이 지나서 병원에 도착하니 4개의 병실에 환자가 30여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Y기사님을 만났다. 그가 빨리 이 자리를 피하라고 하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내용은 알 필요가 없고 무조건 피하라고 했다. 나는 더욱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D경찰서 형사들이 당신을 잡으러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용을 물어본 즉 당신이 불량 염소 통을 보내서 운반 도중에 터져 배수지 주변 주민들이 염소 가스를 마시고 중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해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염소 통 구경도 못했기 때문에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아 피하지 말고 만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사고 경위는 역에 도착한 염소를 운반 도중에 인부의 부주의로 주입구가 파손되어 염소가 누출된 사고였다. 그 당시만 해도 대전역에는 지게꾼들이 100여명 있었고 리어카꾼도 50여명 있을 때이다. 소화물을 운반하는 기능이 없었고 또한 많은 실업자들로 생활이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퇴근시간이 지나 대전역에서 염소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자 차석인 Y기사님은 기공장 L씨에게 역전에 가서 염소를 찾아 배수지에 탁송하여 오늘 저녁부터 염소를 투입하도록 지시했다는데, 탁송 경비로 500원을 받아 L씨는 300원을 리어카인부에게 주고 운반하도록 합의를 보고 귀가하였고, 리어카인부는 300원으로 역전 뒤에 있는 시장에서 집안 식구들의 저녁 반찬으로 꽁치와 채소를 적당히 산 다음 염소를 리어카에 싣고 판암동 배수지 후면 아래까지 도착해서 도로변 측구에 굴리는 순간, 도로 옆에 있는 돌멩이와 부딪쳐서 그 충격으로 통의 주입구가 파손되면서 염소 60kg이 누출된 사고였다. 그 당시만 해도 생활이 어려워 실로 짠 장갑도 구하기 어려울 때였다. 추측해보면, 날씨는 춥지(영하 12도 정도), 배는 고프지, 손은 시리지, 저녁 7시경이니까 날은 어둡고 해서 급한 마음에 밑으로 굴렸는데 그게 잘못되어 돌에 맞아 큰 사고를 낸 것 같다.

갑작스런 염소 누출로 인근 주택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미처 대피를 못하고 30여명이 질식하여 쓰러지고, 긴급 출동한 경찰과 소방대원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당시는 환자를 이송할 자동차가 없었다. 옥천 쪽에서 대전시내를 통과하는, 석탄 등을 운반하는 화물차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들 트럭으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참고로 염소의 위력을 설명하면 소량이지만 완전 파괴되었을 경우에는 반경 2km 정도까지 영향을 미치고, 밀폐 장소에서는 100m 정도에서 흡입할 경우 현장에서 사망할 수도 있는 위력을 갖고 있다. 도로에서 터졌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또한 현장에서 리어카 인부가 길 옆에 쌓인 눈으로 염소통을 덮었기에 피해를 최소로 막았다고 본다. 리어카 인부는 현장에서 염소 가스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염소는 물과 혼합되면 액체로 변하기 때문에 가스와 같이 질식할 염려가 없다.

병원에 있는데 10시쯤 D경찰서 수사과 형사가 찾아왔다. 일단은 경찰서로 갔다. 오후 늦게까지 조사가 계속되었다.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오해는 풀렸으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사망한 사람과 입원 환자에 대한 치료경비와 후에 재발할 경우에 대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당시엔 위험물 취급 규정이 없었다. 어떻게 취급해야 하고 시내를 통과할 때는 어떻게 하라는 등등….

위험물 취급 규정 만들어지다

그 사고로 리어카 인부는 병원에서 사망하고 배수지에 근무하던 공무원은 3개월 정도 치료 후에 퇴원을 했고 주민들은 경상으로 1∼2주 정도 치료해서 완치가 되었다. 사망한 유족은 가성소다 조합에서 협의 보상하였고 주민들의 치료비는 시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종결을 지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위험물 취급 규정이 만들어졌다. 지금도 정수 과정에서 대부분 염소를 사용하고 있지만 염소가 터졌을 때의 피해 상황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정수장이 시내에 있는 경우에는 더욱더 위험하다. 대부분의 정수정 근무자들은 중화설비가 있으니까 하고 너무나 안이하게들 생각하고 있다. 대규모 정수장에는 1톤 규모의 염소통이 수십 개씩 동시에 보관 관리되고 있다. 만약에 이들 염소통이 동시에 누출 또는 폭발한다면 4∼8km 안의 주민들이 사망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질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 보라. 염소는 정말로 편리하면서 잘못 다루면 큰일나는 것이다. 최근 미국 등 선진 외국에서는 이러한 위험 때문에 소독 방법을 위험성이 없는 소금을 전기 분해하는 차염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다. 차염 시스템은 정수 생산 경비가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가스로 인한 위험이 전혀 없고 안전하다. 국내에도 일부 소규모 정수장에서 사용되고는 있지만 아직은 초보단계이다.

나는 상수도 전문가로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건의하고 있다. 사고를 목격하지 않은 사람은 피해 정도가 쉽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이러한 사고가 대도시에서 발생한다면 문제는 심각할 것이다. 상수도 책임자들은 오늘 무사함이 내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주의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수도 시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노후화 되면 되었지 더 튼튼해지지 않는 것이고 수돗물은 24시간 쉬지 않고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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