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자연재해사 /김현준 박사(한국건설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시대 큰비 283건, 큰물난리 177건, 홍수 16건 발생
서울 부근은 1400년 이후 홍수 172건 발생---7∼8월 가장 많아
한강 도성안 개천과 한강에 수표 설치 홍수위 측정

   
▲ 김현준 박사(한국건설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온고이지신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可以爲師矣). 논어의 위정편(爲政編)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다.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뜻으로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수문학자(水文學者)에게는 가슴깊이 새겨둘 구절이다.

필자의 전공은 수문학이다. 수문학이 자연에서 발생하는 강우와 증발, 유출에 대한 물의 순환과정을 다루는 분야이다 보니, 과거에 발생했던 가뭄 및 홍수 등에 대한 기록은 실험으로 재현할 수 없는 귀중한 실증자료가 될 수 있다.

최근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자연재해들은 그러한 현상이 원래 자연의 모습임을 보여주며, 사람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도 이상기후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극심한 홍수와 연이은 이상가뭄, 관측 기록치를 갱신하며 중부지역에 해를 거듭해 찾아오는 이상홍수 및 2002년, 2003년에 한반도에 상륙했던 상상을 초월한 태풍 그리고 지난해 중부지방 집중호우 등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미 과거 자연기록에 있었던 일들이며 이러한 사실을 역사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조선시대의 자연재해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과거의 역사기록으로부터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수문학과 관련된 자연재해 기록을 찾으려고 ‘『조선왕조실록』 CD-ROM(서울시스템, 1998, 2001)’을 이용해 조사작업을 지속해 왔다. 2005년 말부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노력으로 CD-ROM이 아닌 인터넷(http://silok.history.go.kr)을 통해서도 『조선왕조실록』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지진과 황사를 제외한 자연재해 내용을 정리해 소개하고자 한다.

   가     뭄   

‘수한(水旱)은 하늘이 하는 일이고, 갈고 씨 뿌리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인사(人事)를 닦고 천시(天時)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 일이다’ -『태종실록』 11/06/17(병오)-

■  가뭄기록  『조선왕조실록』중 태조부터 순종(1392∼1910)까지 가뭄에 대해 검색한 결과, △가뭄 3천173건 △한발(旱魃) 93건 △한해(旱害) 63건 △기아 118건 △흉년 5천948건 △한재(旱災) 1천766건 △기근 1천657건 등 총 1만2천800여 건의 자료가 검색되었다.

검색기록을 보면 세종·성종·중종·효종·현종·영조·정조 시기에는 기록이 많이 있으며(이들 왕들의 제위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조선후기인 순조·헌종·철종 시기에는 비교적 기록 수가 그 이전에 못 미친다([그림 1] 참조).

[그림 1] 『조선왕조실록』의 왕대별 가뭄기록

   

해를 거듭해 연간 가뭄기록 건수가 10회 이상인 기록들도 보이는 데 태종(14∼16년), 세종(17∼18년, 21∼22년, 25∼27년), 성종(5∼6년, 12∼13년, 16∼18년, 21∼22년, 24∼25년), 중종(4∼5년, 9∼12년, 20∼24년, 27∼28년, 34∼37년), 명종(8∼10년, 14∼15년), 선조(36∼37년), 광해군(6∼7년), 인조(18∼19년), 효종(7∼8년), 현종(1∼2년), 숙종(3∼4년), 영조(47∼49년), 정조(5∼6년, 22∼23년), 고종(13년) 등이다.

『국역증보문헌비고(누리미디어, 2000)』의 기록을 보면, 490년 동안 총 100회의 가뭄이 발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평균적으로 5년에 한번 꼴로 가뭄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으며, 2년 연속 가뭄은 15회, 3년 연속 가뭄 4회, 4년 연속 가뭄 1회, 6년 연속 가뭄 2회 등 해를 거듭해 가뭄이 발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효종 8년(1657)부터 현종 3년(1662)까지, 현종 7년(1666)부터 현종 12년(1671)까지는 6년 동안이나 연속해 가뭄이 지속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  가뭄피해   세종 5년(1423년) 4월 16일의 기록을 보면, 경기감사가 보고하기를 ‘경상도 녹전(祿轉)을 조운(漕運)하는 때를 당하여 가뭄으로 말미암아 강물이 얕아져서 배들이 여울을 만나게 되면 통행하지 못하니, 여흥·음죽·이천·천령·지평·양근·광주 등지의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각기 물가에 사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여울을 파서 배가 통행하도록 하소서’라는 대목을 볼 수 있다. 가뭄이 극심해 남한강의 물이 얕아졌기 때문에 경상도의 세금을 남한강의 조운을 통해 서울로 옮기기가 어렵게되자 하상준설공사를 건의한 것이다.

이처럼 실록에는 가뭄이 심해 하천이 단절되고 여울이 얕아져 건너다닐 수 있었다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선조 36년(1603)에는 평안도의 청천강을 사람들이 걸어서 건널 수 있었고 인조 3년(1625)에는 북도에 가뭄이 들어 두만강이 얕은 여울이 됐으며, 인조 19년(1641)에는 경상도의 가뭄으로 낙동강의 물줄기가 끊겼다고 했다.

또한 현종 4년(1663)에는 경상도에 가뭄이 극심해 상류의 물줄기가 거의 끊기면서 낙동강의 뱃길이 끊겼고, 현종 5년(1664)에는 충청도 영동현의 용당천이 한 나절이나 흐름이 끊겼다고 기록되어 있다(용당천은 수원이 매우 풍부해 아무리 큰 가뭄에도 흐름이 끊긴 일이 없었다).

   
▲ 가뭄으로 옛 모습을 드러낸 운암제. 전라북도 임실군에 있는 섬진강 다목적댐의 옥정호에 잠겼던 운암제(1926년 축조)가 가뭄(1994년, 섬진강댐 저수율 6%)으로 웅장했던 자태를 드러내었다(한국건설기술연구원, 김원 촬영).

숙종 35년(1709)에는 청주 청천강 물이 끊어졌는데, 청천강은 속리산의 하류이자 달천의 상류로서 근원이 가장 멀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지만 이날은 5리(약 2㎞) 가량이나 물이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종 13년(1482년) 7월 16일에는 경자년부터 농사를 실패했는데 ‘지난해에는 더욱 심하였고 지금도 가뭄이 심하니 장차 올해에도 흉년이 들 것’이라고 했고, 성종 16년(1485)에도 ‘전번 달에 비가 오지 않았고 이번 달에도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하여 두 달 이상 비가 오지 않은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종 24년(1529)에는 한발이 심하자 세금을 메길 때 하지하(下之下)로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고종 때에도 해를 이어 가뭄이 자주 발생했는데, 왕실의 사금고인 내탕고와 선혜청, 사청 등에서 기근 대책비용과 식량을 긴급 조달했다. 조선 말기 이러한 장기간의 가뭄은 외세의 침략과 함께 재정파탄과 국력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  가뭄 대책    조선지배층의 가뭄에 대한 시각은 ‘사람의 도리를 다 못했을 경우나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에 발생한다’는 성리학적 유교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가뭄이 발생했을 때 임금은 임금대로, 관리들은 관리대로 자기의 소임을 다 했는지, 사치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원한이 맺힌 사람들이 있나 살펴봤으며, 기우제를 지냄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자 했다.

그러나 가뭄을 이처럼 소극적으로만 대처한 것은 아니었다.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수리사업을 일으켰고 평상시에도 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방의 수령들을 감찰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농서(農書)와 농정(農政)에 대한 신기술 및 정책을 수렴하고자 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 농사에 이용하고 있는 수차(水車)를 도입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측우기와 수표 

신해년 이후로 내린 비의 많고 적음을 반드시 기록해 두었는데 …중략… 지난해 이 달에는 측우기의 물깊이가 거의 1척(尺, 영조이후의 주척은 1척이 208.3㎜) 남짓이나 되었는데 올해 이 달에는 내린 비가 겨우 2촌(寸, 약 41.66㎜)이었다. 가을 추수가 어떨지는 미리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백성들의 실정은 참으로 매우 딱하다’ -『정조실록』 23/05/22(기묘)-

   
▲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
■  측우기   실록에서 측우기와 관련된 정식기록은 세종 23년(1441) 8월 18일 호조에서 강우량 측정의 당위성과 방법을 보고한 것이다. 이에 앞서 강우량을 측정하는 유사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 해 4월 29일의 기록에 의하면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후에 문종이 된 세자가 구리 그릇을 제작해 빗물을 처음으로 담는 실험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실험 내용을 좀 더 체계화해 측우기의 필요성과 제작방법을 보고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또 이듬해인 세종 24년(1442) 5월 8일에 호조에서 ‘우량(雨量)을 측정하는 일에 대하여는 일찍이 벌써 명령을 받았사오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갖추어 조목별로 열기(列記)합니다. …후략…’라고 보고했는데, 이로부터 측우기에 대한 최종 제작안과 측량방법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  측우기로 측정한 강우자료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 기록이 실록에 처음 기록된 것은 중종 37년(1542) 5월 29일로, ‘28일부터 이날까지 비가 내리기도 하고 개기도 하였는데, 측우기의 물을 잰 것은 5분(약 10.4㎜) 이었다’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는 최초의 강우량 측정값이다.

이후 왜란과 호란의 전화(戰火)를 겪으면서 측우기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46년(1770) 5월 1일에 와서야 세종조의 옛 제도를 모방해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고 팔도와 양도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해 우수(雨水)의 다소를 살피도록 했으며, 측우기의 척·촌이 얼마인가를 보고해 알리도록 했다.

 정조 15년(1791) 4월 23일에는 측우기의 수심을 측량하는 법식을 정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측우기의 수심 수치를 써서 올릴 때 그 깊이가 매번 서로 다르고 시한도 역시 일정하지 않다. 앞으로는 이른 새벽부터 오시(午時, 11∼13시) 초삼각(初三刻)까지, 오정(午正) 초각부터 인정(人定, 22시경)까지, 인정부터 다음날 이른 새벽 이전까지 세 차례로 나누어 써서 올리라’라고 하여 측정시간의 기준을 정하고 엄격하게 지키도록 했다.

측우기와 관련된 실록 기록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기록을 정조 23년(1799) 5월 22일에 볼 수 있다. 정조는 “신해년 이후로 내린 비의 많고 적음을 반드시 기록해 두었는데 1년 치를 통계해 보았더니 신해년에는 8척5촌9푼(약 1천789㎜)이었고, 임자년에는 7척1촌9푼(약 1천498㎜)이었고, 계축년에는 4척4촌9푼(약 935㎜)이었고, 갑인년에는 5척8촌(약 1천227㎜)이었고, 을묘년에는 4척2촌2푼(약 879㎜)이었고, 병진년에는 6척8촌5푼(약 1천427㎜)이었고, 정사년에는 4척5촌6푼(약 950㎜)이었고, 무오년에는 5척5촌6푼(약 1천158㎜)이었다.

지난해와 올해의 이번 달을 가지고 계산해 보면 지난해 이 달에는 측우기의 물깊이가 거의 1척 남짓이나 되었는데 올해 이 달에는 내린 비가 겨우 2촌이었다. 가을 추수가 어떨지는 미리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백성들의 실정은 참으로 매우 딱하다.

대체로 지난해에는 호서의 가뭄이 가장 심했는데, 올해에 호서에는 거의 2촌이 넘게 비가 내렸으며 영남과 호남도 경기 고을보다는 낫다”고 하여 8년간의 연강수량 통계치를 가지고 가뭄의 심한 정도를 판단했다. 아울러 월별로도 과거 자료와 비교해 농사에 대한 걱정과 함께 백성들의 처지를 이해하려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림 4]는 1770년부터 2000년까지의 서울지점에 대한 연강수량의 변화를 도시한 것이다. 230년 동안의 연평균 강우량은 약 1천200㎜ 정도이며, 1770년대에 평균보다 적은 강우를 기록하고 있다. 1880년부터 1910년까지는 근 30년 가까이 전체 평균의 50% 이하에 불과한 적은 강우량을 보이고 있는 해도 있어 극심한 가뭄이 장기간 지속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2] 서울지점의 연강우량 변화(1770∼2000)

   

■  수표   수표(水標)와 관련된 기록은 세종 23년(1441) 측우기에 대한 언급과 함께 처음 실록에 등장한다. ‘마전교 서쪽 수중에다 박석(薄石)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부석(趺石)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를 세우고, 쇠갈구리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촌·분수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조(本曹) 낭청(郞廳)이 우수(雨水)의 천심 분수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라’고 했다.

수표의 관측기록이 실록에 수록된 것은 선조 3년(1570)으로 예조가 보고하기를 “이 달 14일 비가 내려 수표교의 수심이 6척4촌(약 1천333㎜)입니다” 라고 했다. 인조26년(1648) 5월 14일자 기록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데, 임금은 “어제 큰비가 내렸는데 수표단자(水標單子)를 아직도 입계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하여 이처럼 태만하단 말인갚라고 했다. 이는 수표의 측정기록을 태만히 한 것에 대해 꾸짖는 내용으로서 수문관측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기록이다.

   

   
▲ 현재의 복원된 수표교(위)와 100년 전 수표교와 수표의 전경. 수표교 상류의 하천 중앙에 수표석이 보인다(사진으로 본 백년 전의 한국, 가톨릭출판사, 1997).
영조 7년에는 ‘단비가 막 쏟아져 수표를 잇따라 알려오고 있으니, 농사를 생각하매 다행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또 ‘신명을 섬기는 것은 마땅히 정성을 해야 하니, 내일 기우를 우선 중지하라’고 하여 비가 와서 개천에 흐르는 하천수위를 수표에 의해 계측하고 보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수표는 도성의 개천에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강변에도 설치해 한강의 홍수위를 측정하기도 했다.

■  수표에 의해 측정된 홍수위 기록   하천의 홍수위를 기록하기 위한 수표는 세종 23년(1441)에 처음 만들어 졌다. 수표는 도성 내 개천(청계천)은 물론 한강변에도 설치되었다. 도성내의 수표는 중부수표, 남부수표 및 수표로 구분되어 있으나, 수표라고 표시된 자료는 중부수표의 연속으로 보여진다.

두 지점의 자료가 동시에 보고된 날짜도 기록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두 지점에서 수표관측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한강수표는 현재 한남대교 북단의 제천정 터 부근에서 측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전웅치(和田雄治, 1917)』의 조선 고대 관측기록 조사보고에 의하면, 도성내의 홍수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기우제등록』 등에서 한강과 도성 내 개천의 수위를 기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에 의하면 서울부근에서 1400년 이후 460년간 발생한 홍수는 172건으로서, 월별로는 7월(75회), 8월(47회), 8월(19회) 순으로 많이 발생했다.

『화전웅캥가 조사한 기록은 명종 1554년부터 영조 1778년까지로, 1554년의 기록은 1회에 그치며 인조 11년(1633) 이후의 기록이 대부분이다. 이 점은 『기우제등록』의 경우도 유사하다. 『기우제등록』은 인조 11년부터 고종 26년(1889)까지의 기우제, 기청제, 기설제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으로 전체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우제 기록과 함께 수표기록(중부, 남부, 한강 및 수표)이 포함되어 있다. 『기우제등록』에 수록된 수표기록은 총 690회에 이르지만, 1779년 6월 11일의 3척5촌(약 729㎜)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숙종의 재위 기간에는 1669년부터 1719년까지 매년의 홍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한강의 수위와 도성 내 개천에서 중부수표와 남부수표 2곳의 수표기록이 있다. 『기우제등록』의 기록에 의하면 중부수표의 경우 10척을 상회하는 홍수는 20번의 기록이 있고 이중에서 수표 상단을 월류한 것도 3회에 이른다([표 1] 참조)

     홍   수     

‘여러 날 동안 큰비가 내리니 수재(水災)가 있을 것이다. 수문(水門)의 전방(箭防)을 속히 걷어치워 수도(水道)를 통하게 하고, 순찰하는 관원과 병조에서는 밤새도록 순시하여 사람을 죽는데 이르게 하지 말라’ -『세종실록』 03/06/16(정미)-

■  홍수기록   조선시대 태조부터 철종까지 조사된 기록들을 보면 △큰비(大雨) 283건 △큰물(大水) 177건 △홍수 16건 등이 조사되었다. 큰비라는 항목이 많이 있었고 큰물이라는 표현이 홍수보다 월등히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홍수보다는 큰물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명종부터 현종까지 132년간에 기록된 내용이 전체기간에 기록된 내용의 절반을 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 시대에 발생한 모든 중요한 사건을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기록을 했다면, 이 시기(명종∼현종)에는 다른 기간보다 더 특별하게 홍수가 자주 발생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의 홍수피해는 전국규모로 발생을 하기도 했는데, 1990년대 경기북부지역에 연이어 발생한 홍수처럼 수년에 걸쳐 연속적으로 발생하기도 했다.

[그림 3] 조선시대의 지역별, 연대별 홍수 기록

   

■  홍수피해   도성 내 개천이 큰비로 넘쳤다는 기록을 태종 7년(1407년) 5월 27일에 처음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세종 9년(1427) 6월 23일에 경상도 상주에 큰비가 내려 산사태로 7명이 죽고 43호의 가옥이 떠내려갔으며, 선산·의성·함창·군위 등 고을에서도 민가와 사찰들이 떠내려가거나 파묻혔다는 경상감사의 보고가 있었다.

침수에 대한 기록은 세조 13년(1467) 5월 27일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는 데, ‘큰비로 한강이 넘쳐서 평지에서 물의 깊이가 30척(약 6.2m)이 되었고, 병조에 전하여 백성들을 옮기게 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현재 한강대교를 기준으로 지정홍수위는 4.5m, 경계홍수위는 8.5m, 위험홍수위는 10.5m로 정해져 있다. 한강이 넘쳐 평지의 깊이가 6.2m나 되었다는 것은 대홍수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서울의 광나루, 잠실 등지는 홍수 시에 물바다가 되었던 곳으로 지금처럼 한강변에 제방이 쌓여있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한강변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명종 2년(1547)에 전국적으로 홍수가 발생했다. 7월 3일 경상도 감사의 보고를 시작으로 전라도·황해도·강원도·평안도·함경도에 홍수가 발생했음을 보고하고 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명종은 “금년의 수재는 팔도가 다 그러한 것이나, 이 장계를 보니 수백 년 내에 없었던 재변이다. 재변을 당한 곳의 전답 피해와 빠져 죽은 사람 수를 자세히 조사하여 치계할 일을 감사에게 하유하라”고 지시했다.

   
▲ 을축년(1925)의 대홍수로 용산 일대가 침수된 모습(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최석로, 1999)
또한 선조 38년(1605)에 전국적으로 큰비가 내렸는데, 8월 1일 홍수피해에 대한 종합보고가 있었다. “대체로 50∼60년이래 경진년(선조13년, 1580년)의 수재가 크다고 하였으나, 지금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팔도의 피해 상황을 다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강원도의 명산도 무너졌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상세한 것을 듣지는 못했으나 전하는 말이 그러합니다. 강릉도 공사(公私) 가옥이 모두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고 사람도 100여 명이나 익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양 등 고을도 수재를 입었다고 합니다. 영월은 상류에서부터 물이 모두 범람하여 횡류하는 재변이 있었기 때문에, 백 년 묵은 1천 장(章)이나 되는 거목이 뿌리째 뽑혀 떠내려갔고 암석도 무너져 내렸습니다. 곡식은 지대가 낮은 곳의 경우에는 모두 모래에 덮여 버렸고, 높은 곳의 경우도 수해를 입어서 물에 잠긴 마름 같기도 하고 마른 갈대 같기도 하다고 하였습니다. 시내가 범람하여 떠내려 간 논밭을 이루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숙종 43년(1717) 7월 12일에는 영남과 관동지역에 대수재가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팔도에 큰물이 졌으며 영남과 관동이 더욱 혹심하였고, 낙동강 일대가 모두 큰 바다를 이루었고 사람이 빠져 죽은 것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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