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자연재해사 / 김현준 박사(한국건설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영조, 조선시대 최대의 청계천 준천공사 시행   
태풍 177건 발생…2002년 ‘루사’·2003년 ‘매미’, 400년 전과 비슷
홍수 범람 줄이기 위해 하천 준설…오늘날 하천·저수로 정비 목적과 동일


   태    풍 

   
‘전답은 천여 석 지기가 모래에 뒤덮였고, 가옥은 크고 작은 것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침수되어 사람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대관령에서 해변에 이르기까지 기름진 넓은 벌판에는 까마득히 백사(白沙)만 보일 뿐이고 익사한 우마(牛馬)가 부지기수였다’ -『선조실록』  38/07/23(을미)-

태풍 발생, 명종 때 29회…가장 많아 

■  태풍기록  『조선왕조실록』과 『고종순종실록』에서 찾아본 태풍기록은 모두 177건이나 되었다. 이들을 왕대별로 살펴보면, 명종(1545∼1567) 대에 29회로 가장 많았고 정종·문종·단종·예종·경종·철종 대에는 기록이 없었다.

왕대별로 재위기간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왕대별 태풍 발생기록수를 왕의 재위기간으로 나누어 재위 1년간에 발생한 폭풍 기록건수를 비교해 보았다. [그림 4]에서 보듯이 태조·명종·성종·태종·현종 때에 폭풍기록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태풍피해   조선시대에 발생한 대규모의 태풍피해 중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태풍 ‘매미’가 연달아 한반도를 강타한 것과 같이 거의 400년 전의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다.

선조 36년 7월 18일 전라좌도 수사 안위(安衛)는 “7월 3일(양력 8월 9일) 2경(21∼23시)부터 거센 바람과 사나운 비가 밤새도록 몰아쳐 돌이 구르고 나무가 뽑히고 집이 죄다 파손되었습니다. …중략… 7월 3일 한밤중에 조수(潮水)가 불어 넘치고 동남풍이 몹시 불어 새로 만든 배 2척을 한꺼번에 말아 올려 조각조각 부수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림 4] 조선 왕대별 재위 1년 동안 폭풍 기록건수

   

선조 36년 7월 3일에 발생한 태풍은 그 피해가 경상도와 전라도에 걸쳐 대규모로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풍피해에 대한 처음 보고는 전라좌도 수사 안위가 보고했는데, 3일 2경부터 거센 바람이 일었다고 했다.

20일에는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이 보고하기를 7월3일 초저녁에 큰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4일 오후에야 그쳤으며 진주·창원·상주 등이 심하였다고 했다. 또 23일에는 전라좌도 수사 안위가 다시 피해상황을 보고했으며, 24일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보성·해남·남원·광주·태인·용담 등에 피해가 있음을 보고했고, 26일에도 통제사가 거듭 보고했다.

이러한 보고 상황을 정리해 보면 태풍은 7월 3일 초저녁에 경상도 남해안으로 시작해 4일 오후까지 전라도와 충청도 내륙 일대를 강타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 인해 많은 전선(戰船)이 파손되고, 인명과 가축이 살상됐으며 가옥과 전답이 유실되었다.

선조 38년 7월에 발생한 태풍피해는 태풍 ‘루사’의 발생시기와 피해지역 및 피해규모가 유사한 점이 많이 있으며, 실록에 기록된 강원도 지역의 홍수 피해 중 최대의 피해임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실록은 선조 38년 7월17일부터 20일까지 태풍으로 인한 지역별 피해상황과 정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해 삼척 오십천의 끊어진 영동선 철교(사진 위, 김현준 박사 촬영)와 정선의 북평교의 당시 모습. 루사’로 인해 전국적으로 5조5천억 원의 피해를 입었고 피해복구비로 8조 원이 소요되었다.
‘7월17일부터 동풍이 매일같이 크게 불더니 갑자기 큰 홍수가 져 객사와 관청, 군기(軍器)·창곡(倉穀)을 휩쓸어 버렸고 크게는 사찰과 작게는 촌락이 물이 지나친 곳은 모조리 쓸려나갔으며, 우마와 가재도구도 남김없이 모두 익사하거나 떠내려갔다. 50∼60년이래 경진년의 수재가 크다고 하였으나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라고 당시의 피해상황을 종합하였다.

또한 지역별 피해 내용도 기록되어 있는데, 영월 지역에 대해서는 △이 달 17일부터 비가 오락가락 하였다. △동풍이 연일 사납게 불었다. △22일 다시 큰비가 억수 같이 퍼붓고 바람이 거세 지더니, 인가가 339채나 떠내려갔다. △영월은 상류에서부터 물이 모두 범람하여 횡류하는 재변이 있었다. △백 년 묵은 1천 장이나 되는 거목이 뿌리째 뽑혀 떠내려갔다. △시내가 범람하여 떠내려 간 논밭을 이루 헤아리기가 어렵다. △불시에 고을을 덮쳐 관사(官舍)·군기 및 공해(公力) 등 여러 채가 일시에 침수되었고 군수는 간신히 피신하였다. △곡식과 나무는 뿌리 채 뽑히거나 말라붙어 완전히 백사장이 되었다고 했다.

강릉지역은 △강릉도 공사 가옥이 모두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고 사람도 100여 명이나 익사하였다. △남대천이 넘쳐서 나무가 뽑히고 집이 부서지니 일시에 떠내려가 처자와 형제 등 일가족이 줄줄이 비끄러맨 채 죽기도 하였다. △전답은 천여 석 지기가 모래에 뒤덮였고, 가옥은 크고 작은 것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침수되었다. △대관령에서 해변까지 기름진 넓은 벌판에는 까마득히 백사로 덮였다. △익사한 우마가 부지기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8월15일(정사)의 기록을 보면 ‘충청좌도와 강원도는 서로 인접해 있으니, 충주의 수로로 원주에 운송해서 강원도의 재해가 심한 곳에 나누어주도록 하라’고 하여 전라도, 충청도의 곡식을 실어다가 풍수해를 당한 타도를 구제하자고 했다.

또 8월21일(계해)의 기록에는 ‘강원도의 수재로 인해 사망한 자들에게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주는 것을 허락한다’ 등 당시 태풍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강원도의 피해복구 및 지원에 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하천 공사  

‘준천의 대책은 역시 모색하기 어려운 일이더니, 이제는 그 실마리를 알 수 있겠다. 이미 조그마한 책자를 하나 만들도록 명하여 ‘준천사실(濬川事實)’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책이 완성된 뒤에는 서문을 지어 내리겠다’ -『영조실록』 36/03/16(신유)-

중종, 조운(漕運) 위한 운하공사 시행

■  하천공사 기록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하천공사 관련 기록은 태조부터 고종까지 총 132회이며, 이중 준설에 대한 기록은 80회, 운하에 관한 기록은 31회, 하천과 관련된 기록은 19회(홍수에 의한 하천 제방의 파괴 및 복구에 관한 기록은 제외)로 조사됐다.

하천을 준설하는 것은 홍수에 의함 범람을 줄이기 위함으로, 오늘날의 저수로 정비 및 하천정비와 동일한 목적에 의해서 시행됐다. 운하의 건설은 지방에서 한양으로 수송되는 물자의 원활한 조운(漕運)을 위해 계획되었다.

역대 왕별로 주요공사를 보면, 태종은 최초로 도성을 관통해 흐르는 개천을 준설하고 순제(蓴堤)에 운하를 건설하려고 했으며, 성종은 용산강의 물길을 돌리는 공사를 위해 현지에 오래 살고 있는 노인의 의견을 반영하기도 했다. 또한 성종은 대규모 관개(灌漑)공사를 위해 황해도 전탄에서 공사를 시행했다.

   

   
▲ 1975년의 청계천 공사(사진 위, 서울시 제공) 모습과 현재의 청계천 모습.
중종은 조운을 위한 운하공사를 여러 곳에서 실시했는 데, 각 구역별로 작업에 참여한 인부의 명패를 세우고 허물어졌을 때 책임을 지는 공사실명제를 시행했다. 영조는 개국 초에 실시했던 개천의 준설공사를 대규모로 다시 시행했는데, 이는 몇 년간 지속된 기근으로 한양의 인구가 증가하고 이들이 도시빈민이 되어 개천주변에 살면서 개천이 하수구로 더럽혀지고, 홍수 시 범람 위험이 있자 대규모 준설공사 실시했다. 이 공사는 개천정비는 물론이고 실업자 구제 측면의 대규모 공사이었다. 순조는 영조이후 간헐적으로 시행되던 준설공사를 대규모로 실시했다.

   
▲ 경진지평(수표교) 문구.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재위기간과 하천공사를 수행한 기간의 관계를 보면, 519년의 왕조기간 동안 46년간 하천과 관련된 공사를 시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종 33년(1537) 이후 영조 11년(1735)까지 약 200년간 하천공사와 관련된 기록을 실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데, 이 기간은 왜란과 호란 등 외침이 많은 시기여서 하천공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거나 비록 하천공사가 있었을지라도 실록에는 등재가 안 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기간 하천공사가 있었다면 실록이 아닌 『비변사등록』과 같은 다른 기록에 있을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인하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의 자료(순조 32년 8월13일)를 보더라도 2∼3년에 한 번씩은 준설공사를 했다고 하는데, 200년 동안 단 한 건의 기록도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기간을 제외하면 평균 7년에 한 번 꼴로 하천공사가 있었으며, 대개의 공사가 왕권을 굳건하게 확립한 이후인 집권 후반기에 실시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준천기록』은 도성의 개천에 대한 것들로서 지방에 위치한 하천을 준설한 기록은 안 보인다. 이는 한양이 조선의 수도이자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고 다른 도시들보다 그 중요성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 때부터 주기적으로 준천

■  청계천 준천공사  영조는 도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의 준설을 위해 주민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는 데, ‘영조 28년 1월27일에 광통교에 나가 인근 주민에게 준천(濬川)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니 주민들이 다 찬성하였다’고 한다. 이에 영조 35년 10월부터 개천의 준설을 위한 제반작업을 진행시켰다.

먼저 그 해 10월6일 홍봉한, 이창의, 홍계희를 준천당상으로 삼고 절목(節目)을 만들게 했고 그 이틀 후에는 몇몇 대신을 보내 지형을 살피게 하였다. 다음 날인 9일에는 한성부당상이 준천도를 올렸다고 하는 데, 여기서 준천도는 설계도와 같은 의미로 보인다.

10월15일부터는 자원자들을 모집했는 데, 영조의 준천공사에서 특이한 점은 “인력동원에 1만여 명이 넘는 자원자가 포함되어 있다”라는 것이다. 또한 도시 빈민을 위한 배려로 모군(募軍)이라고 하여 일당을 주고 노역을 시켰다. 당시 조선은 몇 년째 기근이 들어 지방에서 한양으로 인구가 유입되었다.

   
▲ 구한말의 청계천 모습(최석로 1999년).
1657년 한양 인구가 8만여 명에 불과했으나 12년 뒤인 1669년에는 19만여 명으로 증가해 이에 따라 도시 빈민이 증가하고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늘어난 인구 때문에 영조는 금표지역도 완화했는 데, 이로 인해 산림을 남벌해 목재로 사용하고 개간했기 때문에, 비만 오면 토사가 쓸려 내려와 개천이 막히고 범람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영조 36년 3월 16일에는 오늘날 『공사지』와 같은 성격의 『준천사실』을 작성하도록 했는데, 서문은 영조가 직접 썼다고 한다. 이 서문을 보면 ‘이후의 준천을 하는 것은 후대의 과제이며, 『준천사실』을 펴내어 필요한 조리와 법 등을 남긴다’고 되어 있다.

이 때 광통교와 수표교 교각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는 글을 새겨 넣어 이후로 이 글자가 안 보일 때까지 매몰되면 준설하도록 하였고, 고종 때까지 이를 지키며 주기적으로 준천공사를 수행했다.

  폭     설 

‘내가 함경감사의 장본(狀本)을 보니 정평과 삼수에 연일 큰 눈이 내렸다 한다. 3월에 내리는 눈도 이변이라고 할 것인데 더구나 4월이겠는가. 근일 북방 변경에 걱정스러운 조심이 벌써 나타났는데, 재이(災異)가 이와 같으니 매우 우려스럽다’-『효종실록』 05/05/08(정유)-

폭설피해, 중종 20년에 가장 심해

■  폭설기록   실록에서 폭설기록을 찾기 위해 설해로 검색해 보니, 중종 20년의 기록 한 건뿐이었고 △폭설 6건 △대설 7건 △큰 눈 12건으로 홍수 및 가뭄과 비교해 그 기록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나 함경도와 제주도에서 눈 피해로 수십 명이나 죽었다는 기록을 찾아 수 있었다.

   
▲ 2004년 중부지방 폭설이 내린 후의 위성사진. 중부지방이 눈으로 덮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눈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태종 2년 9월2일(양력 1402년 10월7일) 풍해도(豊海道, 1417년 황해도로 개칭)에 눈이 내렸다는 기록으로, 그 깊이가 5촌이나 되었음을 적고 있다. 세종 원년(11월8일, 양력 1418년 12월14일)과 14년에도 큰 눈이 있었는 데, 세종 원년에는 한 자가 쌓였다고 하였다.

■  폭설피해   중종 20년 12월1일(양력 1525년 12월24일)에는 제법 큰 피해가 있었다. 어사 김섬이 함경도의 눈 피해상황을 보고하는 데, “신이 보니 함경도는 큰 눈이 내려 평지에도 4∼5자나 쌓인 데다 광풍이 휘몰아쳐 행인들이 묶여있습니다” 또 “바닷물이 언덕 위로 400∼500보(步)까지 넘쳐 연안의 어부의 집 및 소금가마와 어선이 거의 유실되었고, 민중들이 익사하거나 눈에 묻혀 죽었습니다. 그래서 한양에서만도 죽은 사람이 140명인데 눈에 덮인 자잘한 집들에서 나오지 못하고 주려죽은 사람은 반드시 눈이 녹은 다음에야 그 수를 알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중종 22년 3월9일(양력 1527년 4월 19일)과 4월9일(양력 1527년 5월18일)에도 강원도 평강·회양·금성에 눈이 한 자나 되게 내렸고 간성·인제 등에도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선조 36년에는 제주도의 폭설로 인해 귤 농사가 안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 목사 김명윤이 아뢰기를 “지난 임인년(1602년) 11월에 큰 눈이 내렸는데, 평지에도 깊이가 2자가 넘어 겨울이 지나도록 녹지 않았고 정월이 되어도 겨울처럼 추워 꽁꽁 얼어붙었으니 근고에 없던 일입니다.

과일나무의 가지와 잎은 마른 것 같고 공사 과수원의 청귤(靑橘)은 모두 동상(凍傷)하여 2월에 진상하는 청귤을 간신히 봉진했는 데, 말라 맛이 좋지 않으므로 공상(供上)에 합당치 못하니 지극히 황송합니다”고 하였다.

인조 2년 2월 20일(양력 1624년 4월 7일)에는 폭설이 내리므로 군사들로 하여금 민가에 나아가 옷을 말리게 하였다고 했으며, 19년 5월 20일에는 지난달 15일(양력 1641년 5월24일) 경원에 눈이 내렸고 29일에 삼수에 큰 눈이 내리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이나 참새 알만 하였으며 땅에 세 치나 쌓였다고 했다. 21년 3월 2일(양력 1643년 4월 19일)과 26년 3월 1일(양력 1648년 3월 24일)에도 영남좌도(嶺南左道)와 강원도 통천, 평창 등에 큰 눈이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 2005년 12월 호남지역에 내린 폭설로 자동차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주차되어 있는 모습.
효종 5년 5월 8일(양력 1654년 6월 22일)에는 함경도에 큰 눈이 내렸는데, 왕이 이르기를 “내가 함경 감사의 장본을 보니 정평, 삼수에 연일 큰 눈이 내렸다 한다. 3월에 내리는 눈도 이변이라고 할 것인데 더구나 4월이겠는가. 근일 북방 변경에 걱정스러운 조짐이 벌써 나타났는데, 재이가 이와 같으니 매우 우려스럽다”고 걱정을 하였다.

효종 때에는 눈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효종 5년 12월 22일(양력 1655년 1월 29일)에는 또다시 함경도에 큰 눈이 와서 백성 중에 눈에 깔려 죽은 자가 있다고 했고, 효종 7년 4월 12일(양력 1656년 5월 5일)에는 전남도 광주에 큰 눈이 내렸다고 했으며, 10년 3월 10일(양력 1659년 3월 1일)에는 늦봄에 큰 눈이 내렸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현종 10년 3월 15일(양력 1669년 4월 15일)에는 1월에 제천현(堤川縣)에 눈이 내렸는데, 정강이가 묻힐 만큼 쌓였다고 했고, 12년 2월 3일(양력 1671년 3월 13일)에는 제주도에서는 한 길이나 눈이 와서, 산에 올랐다가 길이 막혀 얼어죽은 자가 91명이었다고 적혀있다.

같은 해 3월 24일 (양력 1671년 5월 2일)에도 원주에서 큰 눈이 내렸는데 거의 두 치나 되어 산과 들을 물론하고 흰 땅으로 변하였다고 하였다. 또 13년 1월 19일(양력 1672년 2월 17일)에는 서울에 큰 눈이 와서 한 자 남짓 쌓였으며, 산과 릉(陵)의 소나무가 눌려 부러진 것이 매우 많았다고 적혀있다.

숙종 10년 4월 6일(양력 1684년 5월 19일)에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에 걸쳐서 눈과 우박이 내렸는데, 경상도 지례현에서 3월 23일 밤에 비가 내린 뒤에 대풍이 불어 나뭇잎이 죄다 떨어지고 산봉우리에는 눈이 두어 치 내렸고, 안음현에서 24일 미시(未時, 13∼15시)에 대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우박과 눈이 섞여 내렸다. 전라도 무주부에서 25일에 대설이 내렸고 강원도 영월 등 고을에도 이때에 우박과 눈이 내렸다.

숙종 11년 11월13일(양력 1685년 12월 8일)에는 눈이 오지 않아서 기우제가 아닌 기설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겨울이 반이 지났는데도 날이 따뜻하기가 봄과 같으며, 절후(節候)가 대설이 지났는데도 한 점의 눈도 내리지 않아 기설제를 종묘와 사직단 및 북교에서 행하기를 요청하여 윤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숙종 31년 3월 9일(양력 1705년 4월 2일)에는 봄에 대설이 여러 날 동안 내려 기후가 한랭하기가 거의 겨울 날씨 같으니, 그 까닭을 왕의 부덕하기 때문이라는 자성하는 모습도 보인다.

뜻밖의 기록도 보인다. 숙종 39년 8월 24일(양력 1713년 10월 13일)에 평안도 의주 등지에 우박과 눈이 뒤섞여 내리고, 철산 땅에는 눈이 1자 남직이나 쌓여 3일이 되도록 녹지 않았으며, 황해도 곡산 등지에는 산 중턱 이상에 눈이 내렸다고 한다. 초가을에 많은 눈이 내린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이상기후가 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맺 음 말 

자연재해는 과거에도 있어 왔고 현재도 있으며, 앞으로도 발생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외부로부터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왔으며 우리의 것을 소홀하게 다루어 왔다. 선조들이 물려주신 역사기록에서 과거에 발생했던 가뭄, 홍수, 태풍, 하천공사, 폭설 등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유산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현재의 자연재해를 이해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자랑스런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자랑에 그치지만 말고 활용을 해야 한다. 실록은 후대를 위해 남겨준, 후대만이 볼 수 있는 기록 유산이다. 실록을 만든 당시에는 왕이라도 선왕들의 실록을 볼 수 없었으며, 금서(禁書)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들이 물려주신 유산을 보존하여 계승하고, 최신의 정보화 기술을 이용해 여러 분야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과거의 정보를 이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함으로써 간직하고 자랑만 하는 문화유산이 아닌 살아 숨쉬는 문화유산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으로 될 수 있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역사기록으로부터 과거의 재해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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